[영어 마인드셋] 과정과 결과 중 하나만 택해야 한다면?

언어 배우는 앱 ‘듀오링고’로 뭘 배우기 시작한 지 벌써 2년이 넘었다. 스페인어로 시작해 온갖 잡다한 언어를 이리저리 집적대다가 그나마 진득하게 배웠다 싶은 거는 스페인어, 포르투갈어, 그리고 요즘 배우는 핀란드어 정도인 것 같다.

듀오링고의 체계상 순위도 유지하고 매달 챌린지도 달성하고 하려면 내가 보기에 매일 경험치를 100-200 정도씩은 쌓아야 할 것 같다는 결론을 내렸는데, 학습이 어느 정도 진행되니까 내용도 길어지고 외울 것도 늘어나서 점점 많이 틀려서 하트만 깎아먹을 때도 많고 좀 시들해져서 요즘은 20xp 정도나 겨우 채우고 있다.

그런데 문득 하나 깨달음을 얻은 게 있다. 초반부터 부지런히 달려서 눈에 보이는 “결과”를 얻으려면 그냥 머리 써서 최대한 경험치를 쉽게 많이 얻는 방법을 쓰면 된다. 생각할 시간에 그냥 힌트 눌러서 보면서 하면 하트도 아낄 수 있다. 그런데 말했듯이 요즘 학습이 어려워지면서 진도가 늘어지니까 처음에는 억지로라도 경험치만 채우면서 쉬운 거만 계속 하다가 ‘이게 다 무슨 의미인가’ 싶어 그냥 퀘스트 하나만 깨고 끝내더라도 뭐라도 남게 배우자 싶어져서 분량은 줄이는 대신 힌트를 안 보고 틀리면 틀리는 대로 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이렇게 “과정”에 집중해 보니까 훨씬 (머릿속에) 더 남는 게 많다. 비록 경험치는 별로 못 쌓았지만….

이게 다른 건 몰라도 언어 학습에서는 핵심인 것 같다. 생각할 시간과 여유를 전혀 주지 않고 “열심히 공부했다”는 느낌을 위해 “결과”에 집중하며 달리는 공부가 내게 제대로 된 성과와 동기부여로 이어지지 않는 이유. “kivi”라는 단어를 만났을 때, 동사를 보고 유추해 뭔가 뛰어갈 수 있는 동물이군… 생각하고 reindeer를 썼는데 이게 wolverine인가 그랬다. 이 과정에서 결과를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면 그냥 힌트를 보고 정답을 입력할 수도 있지만(내가 그동안 해 온 방식), 그러지 않고 틀려도 괜찮다, 그냥 해 보자는 마음으로 배우니까 오히려 좀 더 선명한 기억으로 남는다. 저 단어가 정확히 뭔지는 기억하지 못해도 틀렸던 기억 때문에 이제 적어도 reindeer는 아니라는 걸 기억했으니까 이것도 나름의 성과다.

핀란드어를 배우면서, 이건 영어보다 훨씬 더 학습 수준이 떨어져서 그런지 이래저래 느끼는 바가 많다. 영어는 내가 좋아하기도 하고 그동안 훨씬 더 친숙해진 언어다 보니, 요즘은 거의 영어로 뭘 접하면서 못 알아들어도 답답한 기분은 들지 않았는데, 아직 핀란드어는 모르는 것도 많고 답답한 것도 많다.

그런데 중요한 건, 그 답답함을 해소하는 방식에 따라 길게 봤을 때 학습의 질이 크게 좌우되는 것 같다.

우리가 이런 공부를 하는 건 결국 결과를 보여 주고 증명하는 게 아니라, 그런 게 아니라도 내가 스스로 어딘가 이걸 써먹을 수 있게 하기 위함이 첫 번째 이유인데(물론 결과나 증명도 학습의 이유에 들기는 하겠지만 첫 번째는 아니다. 적어도 내가 원하는 배움에 한해서는) 어느 순간부터 나도 모르게 주객이 전도되어 결과를 예쁘게 꾸미기 위해서 종종 과정을 축소하고 감추게 된 것 같다. 난 이러느라 제대로 못 배운 게 되게 많다. 그래서 앞으로라도 내가 지금 이걸 왜 하는지, 본질적인 목적에 집중해서 과정을 진행해 보려고 한다. 과정과 결과, 둘 중 뭐가 더 중요하느냐, 하는 물음은 언제나 우리 인간을 괴롭게 하는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이제 “길게 본다면 언제나 ‘과정’이 중요하다”는 답을 내릴 수 있게 되었다. 이 말은 곧 “언제나 ‘과정’이 중요하다”는 말이 된다. 왜냐하면 나는 이제 모든 고민을, 삶을 길게 보고 본질적으로 정면돌파하기로 정했으니까.

심지어 결과는 과정과 같은 층위에 있는 문제도 아닌 것 같다. 말하자면 그냥, 사물이 타고 남은 재 같은 거다. 뭘 태우면 무조건 재가 발생하는데, 딱히 재를 어디에 쓸 것도 아니면서 재를 예쁘게 남기기 위해서 태우는 과정을 조정하는 것과 비슷하다고나 할까? 다 쓰고 보니 썩 잘 들어맞는 비유는 아닌 것 같다.

아무튼 중요한 건 과정이다.

그리고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사회가 구성원이 과정과 본질에 집중할 수 있도록 좀 더 여유를 줄 수 있는 구조를 만드는 거겠지. PS. 이 글 올리기 전에, 혹시 몰라서 kivi를 검색해 보았다. wolverine이 아니라 stone이었다. 이걸 찾자마자 내가 아까 틀렸던 순간이 다시 재생되었다. 하지만 아마 내일 가면 나는 이 단어를 또 까먹겠지.

내가 앞서 한국어 단어 “진득하다”가 기억나지 않아서 비슷한 느낌의 단어를 이리저리 써가며 한참이나 찾았던 것과 비슷하다. 인간의 기억력에는 한계가 있고(잊을 수 있어서 좋은 일도 분명히 많다), 대신 내가 기억에 남겨 두고 유창하게 쓰고 싶은 단어들은 그냥 “열심히 억지로 외우는” 게 아니라 두뇌에 부담을 주지 않는 선에서 (가능하면) 인상적인 이미지를 연상하며 가볍게 자주 보면 되는 것 같다.

과정에 집중하는 학습의 핵심은, 오늘 틀려도 되고 내일 또 틀려도 되는데, 그러니까 부담 갖지 말고 그냥 계속하는 것이 아닐까? 이렇게 쓰고 보니까 인생의 모든 시도가 다 이 말에 해당되는 것 같다.

자고 일어나면 내일은 더 가볍게 더 무모하게 뭐든 해 봐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