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 마인드셋] 문법 먼저? 회화 먼저?🐣

다큐 시리즈 번역 자막 작업을 무사히(?) 마치고, 오늘은 오랜만에 영상번역가 친구들을 만나러 간다.

이동 시간이 길어서 그 틈에 무슨 얘기를 써 볼까 하다가 갑자기 이 주제가 떠올랐다. 영어를 잘 하려면 문법, 회화 중 어느 쪽을 더 먼저 해야 할까?

스포일러 타임🕰
그냥 하고 싶은 거 먼저 하면 된다. 길게 보면 어떤 것을 “먼저” 해야 한다는 순서 관계가 큰 의미가 없어지니까 어느 쪽이든 그냥 나를 좀 밀어 주고 추진력과 꾸준함을 줄 수 있는 방식으로 익히기 시작하면 추가로 공부할 게 계속해서 새로 나타나면서 내 영어 세계(혹은 언어 세계)가 차근차근 넓어진다.

다큐 얘기를 좀 더 해 볼까 한다. 영한 번역은 기본적으로 영어 문장을 번역자가 한국어 문장으로 새로 짓는 작업이다. 언뜻 Hi?를 “안녕(하세요)?”로 해석하듯 모든 단어와 문장이 일대일 매칭돼서 산수 계산 문제처럼 깔끔하게 떨어질 것 같지만, 내 경험상 딱히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영상 자막 번역은 다른 번역 분야와 다른 뚜렷한 특징이 하나 있는데, 바로 글자 수 제한을 맞춰야 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번역 문장이 무한정으로 길어질 수 없고, 출근길 만원 버스에 내 몸을 욱여넣듯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어질 때도 많다. 그런데 이런 조건에서 번역 문장을 만들어내면 나중에 보면 내가 쓴 건데도 이게 무슨 말이야? 싶은 문장을 종종(사실은 자주) 만난다. 그래서 이런 문장들은 검토 과정에서 허둥지둥 정신 차리고 다시 고쳐쓰곤 한다.

그런데 이렇듯 번역도 기본적으로는 한국어 문장 작문이다 보니, 영어 말하기/쓰기와 속성이 좀 비슷하다. 해당 언어에 어느 정도 유창하다면(내 한국어처럼) 사례를 참고하는 횟수가 훨씬 더 줄어들어도 괜찮지만, 정식으로 의뢰를 받아 하는 번역 작업 때는 나도 한국어 용례를 매우 많이 참고한다. 사전도 보고, 검색 결과도 참고해서 해당 어휘에 적절한 주술 호응이나 어감을 파악하는 것이다. 그리고 당연하지만 영어에서도 이 작업이 똑같이 적용된다.

언어에 관계없이 아웃풋(말하기/쓰기)은 기본적으로는 기존 예시 문장을 이리저리 조각보처럼 엮어 만드는 작업이다. 대단히 새롭고 창의적인 문장을 써야 할 것 같지만 실제로는 대부분 이미 존재하는 말 조합을 빌려와 변주하는 패러디에 가깝다.

그래서 문법이랑 회화 중에 뭘 더 먼저 해야 하느냐는 질문에 답을 하자면, 애초에 이 질문은 약간 초점이 엇나가 있다. 우리가 가장 먼저 해야 하는 일은, 우선은 영어를 익혀야 할 근원적 이유와 동기부여를 찾아야 한다. 이게 없다면 딱히 이 글을 읽을 필요도 없어진다. 내 삶에 다른 중요한 일들이 많은데 딱히 필요도 없는 영어에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은 기분에” 쓸데없이 자리를 내어 주진 말자. 인생은 길고도 짧으니까.

영어를 하기로 정했다면, 그다음 단계는 이미 영어를 쓰고 있는 사람들이 어떻게 영어를 쓰고 있는지를 익히는 거다. 이걸 충분히(?) 많이 하다 보면 감이 잡힌다. 문법, 사전 같은 이론은 기본적으로 충분히 쌓인 사례를 후대에 정리한 거지, 이게 사례를 앞설 수는 없다. 그러니 남이 정리해 준 이론을 손쉽게 익히는 게 더 빠를 것 같지만 결국에는 잡다하고 풍성한 사례를 익히며 이론을 체화하는 게 길게 봤을 때는 어쩌면 가장 빠른 방법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말했듯이, 언어 세계에서 속도 측정은 결국 별 의미가 없다.

번역문은 언어 세계에서도 가장 표준어를 잘 지키는 용례 모음이라고 할 수 있다. 실생활에서 다수 한국어 사용자들이 “~하던 말던”이라고 쓰는 표현을 예로 들자면, 1) 그냥 생각 없이 “~하던 말던”이라고 쓰는 사람들은 한국어 회화를 편안하게 구사하는 원어민이다(회화에 집중하는 방법). 2) “하든 말든”을 검색해 보고 뜻을 알아 보는 게 우리가 보통 하는 (문법에 집중하는) 영어 공부의 방법이다. 3) 사람들이 자유롭게 쓰는 “하던 말던”을 편하게 알아들으면서도 나는 “하든 말든”이라고 쓸 수 있다면, 원어민 중에서도 언어 능력을 열심히 갈고닦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문법과 회화가 결합된 형태).

결국엔 문법도 회화도 다 하는 게 좋지만, 당장은 길게 생각하지 말고 그냥 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