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 마인드셋] Q. 영화 영어로 보면 도움되나요? A. 됩니다 (제곧내)

“제곧내”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몇 년째 몰랐고 일부러 찾아 보지도 않다가 최근에야 우연히 알게 되어서 괜히 써 보았다. 참고로, “제곧내”는 제목이 곧 내용이라는 말의 줄임말이다(진심으로 이 말을 몰랐다가 배운 자의 친절한 설명).

블로그 글쓰기는 무조건 “두괄식”으로 하라길래, 평소답지 않게 결론부터 내 보았다. 영화를 영어로 보면 도움이 되냐는 물음에 딱 3초 내로 예/아니오로 대답하라면 나는 “예”라고 답하는 쪽이다. 하지만 나와 정확히 같은 의견을 가지고도 “아니오”라고 답할 분도 분명히 있을 것 같다. 원래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고도 하지 않는가(The devil is in the detail). 이 말은 “악마”를 결정하는 것은 단번에 보이는 요소가 아니라 아주 교묘하게 숨어 있는(?) 세부 요소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나는 왜 “예”라고 생각하는지, 설득하는 글쓰기를 한번 해 보겠다. 나는 영화도 좋아하고 영어도 좋아한다. 그래서 내가 좋아하는 이 두 가지를 한 번에 활용할 수 있는 영상 자막 번역 업계에 입문했다. 아마 둘 중 하나만 좋아했다면 자막 번역을 할 생각은 못했을 것 같다. 지금은 전보다 어느 정도 기반을 잡아가는 중이긴 해도 단기로 봤을 때 영상 번역 업계가 썩 유망한 직업이라고 말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다만 2-3년쯤 벌이가 변변찮아도 버틸 수 있는 환경이라면 도전해 볼 만하다).

게다가 영상 자막 번역은, 딱히 영어 실력을 키워 주지도 않고, 자칫하다가는 시청자로서의 시청 경험도 망칠 수 있다(내가 좋아하는 영화만 골라 보기가 아예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길게 보면 번역을 통해 영어 실력이 아주 은근하게는 늘 수 있겠지만, 근본적으로는 스피킹과 영 상관이 없고(번역은 잘하지만 스피킹은 힘들어하는 번역가가 생각보다 많고, 스피킹은 잘하지만 번역은 서툰 사람들은 훨씬 더 많을 것 같다), 계속 보면 알아서 실력이 늘 것 같지만(모든 영어 학습자의 소망) 나는 솔직히 일하면서 보는 영화/드라마 편수가 오히려 훌쩍 줄어들었다. 심할 때는 일할 때만 보고, 나머지 시간에는 자막이 들어가는 영어 콘텐츠를 안 볼 때도 있다.

그래서 결론이 뭐냐면, 영어를 가지고 일하는 직업을 갖더라도 영어 스피킹은 무조건 따로 배우고 익혀야 한다. 일단 이게 습관으로 자리잡히면 그때부터는 일할 때 접하는 자료들도 영어 학습에 도움이 되어 준다. 질문이 “번역가가 되면 영어 잘하게 되나요?”도 아닌데 왜 이런 결론으로 샜냐면, “영어로 콘텐츠를 보는 문제”를 다루려면 한국어 자막 얘기를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그냥 한 번 보고 지나치는 수준이 아니라 직접 자막을 만드는 입장이므로, 한국어 자막을 보는 이들 중에서는 가장 오디오를 열심히 듣는 시청자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단언하건대, 한국어 자막이 있으면 무조건 영어 학습을 작게든 크게든 방해한다. 이건 태도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자극 반응 자체가 그렇게 설계돼 있어서 자동으로 일어나는 과정이라 우리 힘으로 어떻게 인위적으로 조절할 수가 없다.

나도 그동안은 한국어 자막이 구체적으로 어떤 방해를 하는지 명시적으로 알지는 못했다. 그런데 요즘 한 드라마를 한국어자막/영어자막/무자막으로 계속 교대해 가며 보다 보니 인제 좀 감을 잡겠다. 자막 하나가 스쳐지나가는 시간은 한국어 자막을 기준으로 최소 1초에서 길게는 대체로 6초를 넘어가지 않는다. 대사 하나를 귀로 들으면서 눈으로 자막을 읽으면서 소화하는 시간은 그야말로 눈깜짝할 사이에 지나가는 아주 빠르면서도 복잡한 과정이다. 그래서 솔직히 “이해했다”는 착각에 빠지기 쉽다. 그동안 내 스피킹이 딱히 늘지 않은 것도 어느 정도는 이 착각 때문이었다.

영어 오디오에 한국어 자막을 켜놓고 영상을 본다고 해 보자. 머릿속으로는 한국어 자막의 도움을 받아 영어 오디오를 이해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냥 한국어 자막을 이해한 것에 가깝다. 왜냐하면 우리 머릿속의 한국어 처리 엔진이 영어 처리 엔진에 비해 훨씬 더 유능하기 때문이다. 일을 능숙하게 잘하는 시니어와 이제 막 일을 시작한 주니어가 짝꿍이 되어 함께 일을 한다고 쳐 보자. 솔직히 업무 효율을 높이려면 방법은 쉽다. 시니어가 100%하고 둘이 했다고 가짜 보고를 올리면 된다(?). 그리고 한국어와 영어 자막을 동시에 틀어놓고 영어 오디오 영화를 볼 때 우리의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과정도 딱 이런 식이다. 하지만 이런 업무 처리 방식에서는 주니어가 일을 전혀 배울 수 없다. 주니어에게 일을 가르치려면 결국 주니어가 실수하고 배우며 성장할 기회를 줘야 한다. 답답하더라도 지켜보고 시니어의 개입은 최소로만 해야 한다.

한국어와 영어도 마찬가지다. 그냥 적당히 영화를 재밌게 보는 게 목적이라면 그냥 한국어 자막이나 더빙을 활용하면 된다. 하지만 영화를 통해 영어를 익히는 게 가장 중요한 목적이라면, 한국어의 개입을 최소화하거나 아예 차단하고 영어 엔진을 가동하는 데 익숙해져야 한다. 이게 처음에는 정말(정말x무한대) 답답하지만, 인내를 가지고 꾸준히 반복해서 보다 보면 어느 순간 시니어의 도움 없이 업무를 진행할 수 있는 슈퍼 최강 주니어로, 더 나아가 시니어로 거듭날 수 있다. 딱 이러한 관점에서 “영화 영어로 보면 도움되나요?”라는 질문에 대한 내 대답은 “완전 됩니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