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 번역작 소개

영상 번역을 하면서 작품을 골라한다는 건 사실 불가능에 가까운데, 작년에 영국 체류 생활을 마치고 인천 집으로 돌아오면서 우연히 참여한 프로젝트의 큐레이션이 제법 마음에 들기도 하고, 무엇보다도 어제 크리스마스 이브를 기점으로 한국 넷플릭스에 전부 올라와서 가볍게 정리해 보려고 한다.

 

1. 해리엇

미국 노예 해방 운동가이자 여성운동가였던 해리엇 터브먼의 일대기를 담은 영화. 영국에 있을 때 개봉 소식을 듣고 보러 가고 싶었는데 찢어지게 가난해서ㅜㅜ 결국 못 보고 온 영화를 작업하게 돼서 좀 신기했다. 그전까지는 시리즈물 일부 회차만 작업하다 처음으로 영화 한 편을 온전히 작업해서 뭔가 각별한 추억이 깃든 작품. 얼마 전까지만 해도 넷플릭스에서 서비스 중이었는데 내려간 모양이다. 시리즈온, 웨이브 등에서 개별 구매로 볼 수 있다. 신시아 에리보가 주인공 헤리엇 터브먼을 맡았는데, 제작 단계에서 백인 배우인 줄리아 로버츠를 쓰자던 웃지 못할 해프닝이 있었다고 한다.

 

 

2. 전혀 아니다, 별로 아니다, 가끔 그렇다, 항상 그렇다

십 대 청소년의 임신 중단에 관한 이야기인데, 전혀 정보가 없이 작업한 첫 영화라서 또 뭔가 좀 각별하다(쓰고 보니 사실 모든 작업이 다 각별해지는구만...). 해리엇이 넷플릭스에서 내려간 걸 보면 나머지 작품도 언제 내려갈지 알 수 없는 상황인데, 작업작 중 딱 한 편을 추천한다면 이거 아니면 카조니어를 고를 것 같다. 이때만 해도 프로젝트 내에서 번역자의 역할 경계를 지금보다 더 모를 때라서 에이전시에다가 내가 제목 추천도 하고 그랬는데, 〈전혀 아니다, 별로 아니다, 가끔 그렇다, 항상 그렇다〉 이 제목을 추천했더니 고객사에서는 그냥 원제 음차 제목을 쓰고 싶어한다고 해서, 그런가 보다 했는데 한국어 제목으로 올라와서 왠지 기뻤던 추억이 있다. 점점 번역작 소개라기보다는 추억 팔이로 흘러가는 중... 이 포스트를 작성하는 시점 기준으로는 넷플릭스 구독 시 볼 수 있다. 시리즈온 등에서 개별 구매도 가능하다. 5년 내로 선댄스 영화제에 직접 구경 가야겠다! 다짐한 계기가 된 작품.

 

3. 프라미싱 영 우먼(프로미싱 영 우먼)

지금 프로젝트 폴더를 보니까 작업 순서로는 세 번째인데, 실제로는 코로나19 영향으로 개봉이 계속 늦춰지면서 공개도 가장 늦게 되었다. 국내 극장 상영이 결정되면서, 내가 극장 자막 번역자라고 사칭한 꼴이 된 난감한 해프닝도 있었다. 결론만 말하자면 극장 상영 자막 번역자가 따로 있고, 다행히 내 자막은 이후 VOD로 풀렸다. 넷플릭스에도 〈프라미싱 영 우먼〉이란 제목으로 크리스마스 이브에 업로드됐다. 아직 이 영화 관련 내상이 완전히 치유되지는 않은 상태라 이 영화를 다시 보려면 시간이 조금 더 걸릴 것 같다(?).

 

4. 더 히든

〈전혀 아니다, 별로 아니다, 가끔 그렇다, 항상 그렇다〉 못지 않게 난감한 원제(You should have left)를 가진 영화. 이때만 해도 공포 영화를 아예 못 보던 쫄보여서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작업했던 기억이 있다(솔직히 시각/음향적으로 별로 무섭진 않고, 오히려 초월적 뭔가에 관한 이야기다). 여기 번역작 리스트 내에서 가장 남자 비중이 큰 영화인데, 주인공인 케빈 베이컨의 아내로 나오는 어맨다 사이프리드 캐릭터에 독특한 매력이 있어서 전반적으로 재밌게 볼 수 있는 작품이다. 극중에서 미국인 가족이 스코틀랜드로 휴가를 떠난다는 설정이 있는데, 오랜만에 스코틀랜드 시골 구경하면서 반가웠던 기억이 있다. 원작은 독일 작가 소설인데, 원제를 그대로 직역해 독특한 분위기를 살린 《너는 갔어야 했다》라는 제목으로 민음사 쏜살문고 시리즈로 출간되었다. 분량이 다소 짧아서 작가 본인이 "45분만에 읽을 수 있는 소설"로 마케팅한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넷플릭스에서 볼 수 있고, 시리즈온 등에서 개별 구매도 가능하다.

 

5. 카조니어

나름대로 내 출세작(?)이라고 할 수 있는 영화. 이상하게 잘 만든 작품이다. 원제는 돈이 많은 사람을 좀 허황되게 일컫는 말인데(Kajillionaire) 약간 온택트 같은 느낌의 한국식 영어 제목을 갖게 되었다. 좋은 피드백도 많이 들었고, 검색해 보면서 "오역 많다"는 트윗도 종종 봤다. 당시에는 아무래도 스트레스를 조금 받기도 했는데, 어쨌건 다양한 피드백을 받을 만큼 사람들이 많이 봤다는 데 큰 의미가 있지 않을까 싶고, 이 프로젝트는 검수자가 따로 없이 나 혼자 하는 작업이라서 번역의 한계는 어쩔 수 없을 것 같다. 오늘 처음으로 넷플릭스 파티로 여럿이서 봤는데, 막상 보면 내 자막만 보이고 영화는 눈에 하나도 안 들어올 것 같더니, 의외로 작품과의 거리를 잘 지키면서 재밌게 봤고 덕분에 좋은 추억을 한 겹 더 쌓았다. 카조니어 덕분에 인터넷 친구(?)도 많이 사귀었다.